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쇼 덴노 (문단 편집) ==== 다이쇼 데모크라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하라 다카시.jpg|width=300]]}}}|| || 의회 민주주의를 주도한 [[하라 다카시]] 수상 || 메이지 시대의 번벌[*藩閥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나가토|죠슈]] 등의 출신자들이 형성한 파벌] 정치에서 벗어나 정당 세력이 활성화되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노동쟁의가 격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를 가리켜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르나, 이 시기의 [[민주주의]]는 [[대공황]]이 불러온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군부의 폭주로 무너지고,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군부 독재 정권이 대신 들어섰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이온지 내각이 실각했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가쓰라 다로]]를 다이쇼 덴노에게 후임으로 추천했고, 그대로 가쓰라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가쓰라는 비입헌적인 입장을 취하고 긴모치와 [[하라 다카시]] 중심의 입헌 정우회와 제휴를 거부하며 대립했다. 이에 입헌정우회는 국민당과 함께 반가쓰라 족벌 타파', '헌정 옹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쓰라 내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가쓰라 다로는 이에 '절대적인 천황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타계하려고 했다. 이에 다이쇼 덴노는 사이온지에게 '정쟁을 중지하라.'는 칙허를 내렸다. 그러나 정당 세력들도 대중들도 이러한 천황의 명령을 무시했다. 심지어 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오자키의 딸 소마 유키카(相馬雪香)는 [[덕혜옹주]]의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 동창이기도 하다.]가 의회 질의 도중 가쓰라와 그의 관료 동지들을 가리켜 "천황을 방어벽 삼아 숨어있다."라고 비난했다. 이 연설에 대중이 크게 동조하여,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가쓰라 내각은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퇴진했고('''다이쇼 정변'''), 절대적이어야만 했던 천황의 명령이 무시당하게 되었다. 이 일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일은 [[메이지 시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다이쇼 덴노가 즉위하자마자 천황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다이쇼 덴노는 [[메이지 덴노]]와 달리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재위 기간에 생긴 별명은 '''존재감이 없는 천황'''(影の薄い天皇)으로 정치인들은 천황을 무시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